[Public Art:퍼블릭 아트] 2월호 2014
창조적 도시를 위한 공공미술과 공공디자인
한은주 Eunju Han
도시는 우리 일상이 펼쳐지는 환경으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공적이거나 사적인 속성의 공간들이 병치되어 인간 개개의 일상을 뒷받침해주고 다시 삶의 영감을 주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위대한 도시는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의 보편적 관심사안에 존재해 왔고, 이상도시에 대한 다양한 제안들로 이어졌다. 르네상스 시대 인간의 삶과 도시기능을 하나의 완결된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관계 지어 해석한 필라레테(Filarete)의 스포르진다(Sforzinda), 19세기말 카밀로 지테(Camillo Sitte)의 도시미론에서부터 빛나는 도시, 가든시티, 최근의 뉴어바니즘에 이르기 까지 이상적인 도시에 관한 제안들은 각 시대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더불어 인간의 공간적 욕망을 담고 있다. 창의도시도 이러한 맥락가운데 하나이다.
창의도시의 근본적인 취지는 도시의 창의적 가능성을 발굴하고 드높여 다양한 측면에서 도시생활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방법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 공공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특정한 시설이나 장치를 세우는 하드웨어에 기반한 접근에서부터, 도시생활에 활력을 줄 수 있는 무형적인 프로그램을 기존 도시공간의 속성에 맞게 적용하는 소프트웨어적인 접근이 있다.
대게는 위대한 도시 만들기에 관한 도시 행정가들의 치적 선전에 가시적 도움이 되는 하드웨어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현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건축위주의 하드웨어 보강에는 도시 물적 자원의 유한성이나 운영프로그램의 빈곤함과 부딪힐 수 있는 위험부담이 따른다.
이에 비해 도시공간에 도입된 예술과 디자인은 좀더 가볍고 부드러우며 즉시적인 방법으로 도시의 창의적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성공적으로 적용되었을 경우, 건축위주의 도시개발이 짚어내지 못한 미세한 공간을 도시생활과 엮어 활력과 영감을 주는 장소로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때때로 창의도시의 개념이 공공미술이나 공공디자인의 보다 광범위한 도시적용만으로 좁게 해석되거나 모든 예술적 개입이 도시공간에 긍정적으로만 작용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사실 도시공간에 적용된 예술적 개입이 늘 좋은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다. 그 형상이 어떠하던 간에 예술품도 도시영역 안에 물리적으로 자리를 차지하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다양한 감각적 자극을 유발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늘 즐거움을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시공간이 개별 예술가나 디자이너에게는 이고(ego)의 성취와 전파수단으로, 정책결정자에게는 행정 전시장으로 오용될 가능성도 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선전의 효율적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스탈린이나 중국 문화혁명시기 마오쩌둥의 정치선전 방식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애초에 이러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공공장소에 가해진 예술적 개입은 예상치 못한 오독을 낳을 수도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다시 창의도시 발제의 근본취지로 돌아가보자. 그것은 이 시점에 맞는 위대한 도시 만들기에 있을 것이다. 위대한 도시란 찬란한 건축물이나 값비싼 예술품의 향연이 펼쳐져 세계곳곳에서 그 도시의 이름이 회자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공공미술이나 공공 디자인과 연관된 행정들은 도시 브랜딩과 관광자원화라는 미명하에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것을 우선시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양한 이벤트가 일어나고 활기가 넘치지만 차분하고 정적인 공간이 어우러져 있는 도시. 밀도가 있고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이 넘치지만,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프라이버시를 보호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도시. 도시공간의 대부분이 온건하고 평범하지만, 몇몇 매우 독특한 특징들로 매력이 넘치는 공간을 품고 있는 도시. 찰스 론드리(Charles Laundry)의 주장대로 위대한 도시는 좋은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다 (Laudry, 2008). 도시의 균형감이 공공미술과 공공 디자인만으로 획득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앞서 언급한대로 공공미술의 도입이 지니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감안할 때, 예술개입의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재고할 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앞으로 언급하는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창의도시 구현을 위해 공공미술과 공공디자인을 적용할 때 그 동안 다소 간과해왔던 유념해야 할 요소들을 짚어보자.
첫째, 위대한 도시 만들기의 중심에는 항상 우리의 일상이 있어야 한다. 특히, 현대도시에서는 일상성에 관한 속성이 공간과 장소를 지배한다. 1989년 뉴욕 시티 프라자에 설치되어 있던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의 틸티드 아크(Tilted Arc)가 주변 회사원들의 빗발치는 민원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1979년에 건축 안의 예술(art in architecture)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세라에게 의뢰된 이 작품은 1981년에 설치되었다.
이 당시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던 세라의 작품이 설치되자 마자 긍정적인 의견과 부정적인 비판이 팽팽히 맞서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완성직후 무려 1300여명의 주변 회사원들이 철거서명에 사인을 했다고 하니, 당시 논쟁의 뜨거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일상적 출퇴근 동선을 비효율적으로 만든다는 것에 그 공간을 자주 이용하는 주변 회사원들이 세계적 명성의 예술가의 이름을 거부하게 만든 이유였다. 이에 대해 세라는 장소특정적으로 디자인된 이 작품이 도시공간을 재해석했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예술적 해석과 개입이 인간 일상의 본질적 흐름을 방해한다면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이 반대자의 의견이었다. 도시공간의 일상적 의미와 예술적 개입이 충돌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공공미술과 공공디자인의 적용은 창의적 소통과 교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도시에 대한 포괄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둘째, 도시에 대한 물리적 환경조건과 비물리적 요구사항에 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성황리에 설치되어온 모리스 아기스(Maurice Agis)의 드림하우스(Dream House)가 2006년 끔직한 비극의 무대가 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드림하우스는 관람객이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매고 형형색색으로 꾸며진 PVC외피에 바람을 넣어 만든 초거대 구조체인 드림하우스의 내부를 경험하면서 관람객도 그 작품의 일부가 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이다. 사고 당시 축구장 절반만한 드림하우스의 지지대가 풀리면서 하늘로 솟구쳐 두 명의 여자관람객이 죽고 세 살짜리 유아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아지스는 법정에까지 서게 되었고, 영국법원은 건강과 안전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혐의로 그에게 유죄를 내렸다. 법적인 선고보다도 자신의 작품으로 인해 소중한 인명훼손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작가는 심각한 자괴감에 빠졌다고 한다. 드림하우스 사건은 예술작품이라고 하여 공공장소에서 지켜져야 할 기본적인 요구사항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근래 미술관계자와의 대화에서 예전 서울 스퀘어 건물에 줄리안 오피(Julian Opie)의 걸어 다니는 사람(walking man)이라는 작품의 심의과정에 얽힌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도시관련 전문가들의 안목을 탓하는 내용이었는데 심의위원들이 감히 줄리안 오피 라는 유명작가의 작품설치에 다양한 트집을 잡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들은 심의위원들의 의견은 도시의 공공장소에 설치될 것이라면 당연히 따져서 점검해야 하는 요소들로, 예술작품이라고 공공 안전문제에 예외가 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만약 밤에 구현되는 이 작품이 주거시설이나 숙박시설 인근에서 잘 보여지는 곳에 설치되어 있다면, 인간의 생리상 잠을 청해야 하는 밤시간 동안 빛 폭력에 시달려야만 한다. 이러한 점들이 묵과된 채 한동안 LED조명을 이용하여 건축물의 전면부를 전광판으로 두르는 미디어 파사드가 우리나라 공공미술의 참신한 도구로 과대포장 된 적이 있었다. 공공미술이나 공공디자인은 단순한 창작행위가 아니다. 공공장소에 설치되며 공공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공미술의 특성상 해당 작가는 충분히 도시공간의 공공성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반드시 도시 및 건축관련분야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 도시민의 건강과 안전성에 관한 충분한 사전조치가 행해지도록 하는 행정적 장치가 필요하다.
셋째, 의사결정이나 진행과정이 결과물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도시계획 및 건축과 공공미술이 통합적이고 장기적인 체계하에서 다루어 져야 한다는 점이다.
익히 잘 알려진 1980년대 프랑스의 라데팡스 신도시 활성화 프로젝트를 살펴보자. 1950년대 파리의 위성도시로 계획되어 건립된 라데팡스는 투자환경조성을 통한 기업유치에 집중적으로 신경을 썼다. 그러다 보니, 구도심인 파리와 문화적 격차도 커지고 점점 삭막해 져갔다. 이에 프랑스정부는 미테랑 집권 이후부터 공공미술을 도입하여 높은 건축물 위주의 도시공간을 순화시키고 예술적 인프라를 확충하여 구도심과 문화적 격차를 줄이고자 했다.
이 프로젝트의 특징은 철저히 관주도로 이루어졌다는데 있다. 우선 라데팡스 개발청이 도시이미지에 맞는 컨셉을 잡고 작품을 선정하고 실행하였다. 도시 정체성에 주안점을 두고 도시의 인프라와 결합된 공공미술을 추구하였다. 예를 들어, 지하철 역사내부에 다양한 작품을 배치해두어 도시일상과 밀접한 장소에서 시민들은 매일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현대 건축물과의 조화를 위해 동시대 다른 나라 예술가들의 작품의 설치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보다 수준 높은 작품을 선별하여 그 시대에 향유되어야 할 예술품을 시민들에게 제공한다는 개념도 내포되어 있었다. 더불어 장소특정적 미술을 도입함으로써 도시공간의 리듬을 일깨우고 개별 공간적 특성이 도시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도록 하였다.
또 하나 우리가 눈 여겨 볼 사례가 있다. 산업혁명기 런던과 함께 영국의 2대도시였던 브리스톨이 1970년대 이후 급격히 산업이 쇠퇴하여 도시공간은 활력을 잃고 슬럼화되어 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조된 재건사업으로 인해 불명확한 도로체계와 도시정보가 도시생활의 혼란을 가중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1980년대 공공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건축가, 도시계획가, 시공무원, 지질학자, 예술가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였다. 도시의 아이덴티티와 도시정보를 다시 구성하고 다듬는 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관련 위원회를 조직하고 브리스톨 시청이 행정적 지원을 하였다.
이 프로젝트의 특징은 민간, 중앙행정기관, 지방행정기관, 시민위원회가 같이 움직이면서 의사결정을 하고 실행해 나간다는 것이다.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접근하는 것도 두드러지는 특징 중에 하나이다. 1980년대에 시작된 일이 최근까지도 장기계획하에 진행되고 있다. 2011-2030에 이르는 다음단계의 장기계획을 수립을 위해 공공미술 전략 매뉴얼을 최근에 완성한바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도시계획과 통합적으로 연계하여 진행된다는 것이다. 브리스톨 지구계획, 중심부 전략계획, 문화전략계획 등이 모두 공공미술정책을 내포하여 통합적으로 관리 운영된다. 이를 통해 도시의 물리적 장치와 비물리적 프로그램들은 일관된 지향점을 가지며, 보다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드러난 아직까지 공공미술에 관한 구체적인 인식의 방향성이 아직까지는 모호하다. 일부는 공공미술이 빈 공공공간에 조각작품을 설치하거나 지루하게 긴 옹벽이나 담장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발간한 공공미술에 관한 보고서(2011)에 따르면, 기념조각상 설립이 주류를 이루는 1960-70년대를 거쳐 제도에 의한 의무적인 예술개입이 시작된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 공공미술은 이러한 인식의 양상 속에서 전개되었다. 2000년 이후, 도시공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공공미술이 적용되어 한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도시계획의 큰 틀에서 공공미술이 다루려는 시도가 확산되고 있다. 또한, 초기의 조각상 세우기에 골몰했던 공공미술의 경향이 점차 도시공간의 프로그램과 합쳐 경험위주로 가고 있다.
도시는 고정된 물리적 장치들의 각축장이 아니다. 각각의 크고 작은 공간들이 매시간마다 점유의 밀도와 실행되는 행위의 유형이 달라 질 수 있는 살아있는 유기적 복합체이다. 일견 도시의 어느 부지에 세워지는 건축물이 한 사람의 건축가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건축 및 도시계획 관련 법규로 만들어진 행정 가이드 라인과 다양한 심의과정들을 거쳐 구현된다. 특정부지의 소유권이 특정인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물 자체가 지니는 도시 내에서 공공성을 고려하여 다양한 단계에서 공공성에 대한 검증과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갤러리라는 한정된 공간이나 정해진 사회적 계급에서 향유되던 예술이 이제 일상이 펼쳐지는 도시공간으로 나와 공공의 정서적 순화, 나아가 도시활성화 등 창의적 가능성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공공미술은 미술계만의 사안이 아니다. 그 동안 ‘미술’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었다면 앞에 붙어있는 ‘공공’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되짚어볼 때이다. 언급했던 거시적 틀 안에서 세부적인 실행전략을 보다 정교화한다면 공공미술과 공공디자인이 위대한 도시를 만드는데 하나의 큰 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